(이미지 출처 : 고품격 문화신문 서울문화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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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피아노거리

오늘 아침, 종각역 개찰구를 빠져나와 익숙한 출구로 향하던 중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코끝을 스치는데, 그 냄새가 묘하게 20여 년 전 어느 날의 기억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빌딩 숲 사이로 쏟아지는 바쁜 직장인들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있자니, 예전 이 길 위에 놓여 있던 커다란 피아노 건반들이 환청처럼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지금은 세련된 보도블록과 현대적인 조형물들로 완전히 바뀌었지만, 제 기억 속에는 여전히 발로 밟으면 맑은 소리가 날 것만 같은 그 시절의 정취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때는 친구들과 혹은 풋풋했던 연인과 함께 그 건반 위를 뛰어다니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충분히 즐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세월은 흘러 이제는 어느덧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고, 자산 가치나 세금 문제를 고민하며 출근길을 재촉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오늘만큼은 잠시 속도를 늦추고 옛 추억에 젖어보았습니다.
종로 피아노거리와 함께 사라진 낭만의 조각들
종로 거리를 걷다 보면 도시의 변화 속도가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약속 장소를 정할 때 고민할 필요도 없이 ‘피아노거리 앞’이라고 말하면 충분했는데, 이제는 그 이름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일반인들이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종로 피아노거리는 단순히 길 위의 조형물을 넘어, 우리 세대에게는 청춘의 한 페이지를 상징하는 고유명사와도 같았습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없었고 길을 찾기 위해 지도를 켤 필요도 없었지만, 그 거리 어딘가에 서 있으면 누군가를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설렘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거대한 프랜차이즈 카페와 빌딩들이 그 자리를 촘촘하게 메우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우리가 나누었던 웃음소리와 서툴렀던 대화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듯합니다. 화려한 네온사인 대신 따뜻한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서 군밤을 나눠 먹던 그 소박한 낭만이 그리워지는 것은, 아마도 제가 그만큼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겠지요.
이 거리는 단순한 통행로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해방구였습니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길거리 공연을 보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수줍은 고백을 건네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세련된 대리석 바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제 눈에는 여전히 낡은 캔버스화를 신고 건반 위를 껑충껑충 뛰어다니던 대학생 시절의 제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자녀의 교육비나 내 집 마련을 위한 재테크 정보에 귀를 기울이는 지금의 일상도 소중하지만, 가끔은 아무런 계산 없이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가슴 뛰었던 그 시절의 무구함이 그립습니다. 종로 피아노거리가 우리에게 주었던 가치는 단순히 시각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바쁜 도심 한복판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여유와 만남의 기쁨 그 자체였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 피맛골에서 마주한 청춘의 맛
피아노거리의 활기를 뒤로하고 낙원상가 방향으로 발길을 옮겨 큰길 횡단보도를 건너면,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좁은 골목길이 우리를 맞이하곤 했습니다. 큰길의 화려함과는 대조적으로 낮고 어두운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그곳, 바로 피맛골입니다.
조선 시대부터 양반들의 말을 피해 서민들이 숨어들던 그 길은, 우리 대학 시절에도 여전히 주머니 가벼운 청춘들이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숨어들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주었습니다. 학교 선후배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기름진 파전 한 접시에 막걸리 사발을 기울이던 그 낡은 식당들은 이제 대부분 대형 빌딩의 지하 상가로 자리를 옮기거나 영영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생선구이 냄새와 옆 테이블의 대화 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비좁았던 그 공간들이, 왜 그렇게 따뜻하고 아늑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 피맛골에서 나누었던 대화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치기 어린 것들이 많았습니다. 세상을 다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던 뜨거운 열정, 취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그리고 이름 모를 누군가를 향한 짝사랑의 고민까지. 막걸리 잔이 오가는 사이 우리의 우정은 깊어졌고,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조금씩 해나갔습니다.
이제는 건강을 생각해서 술을 줄이고, 안주보다는 영양 성분을 먼저 따지는 나이가 되었지만, 가끔은 그 투박한 양은 쟁반에 담겨 나오던 파전과 사람 냄새 가득했던 그 골목의 소란스러움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종로 피아노거리의 세련됨과는 대조적이었던 피맛골의 그 눅눅하고 정겨운 분위기는, 고단한 서울살이를 견디게 해주었던 우리만의 작은 도피처였습니다.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아가는 종로 산책의 묘미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종로가 여전히 매력적인 이유는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로 피아노거리라는 명칭은 공식적으로 사라졌을지 몰라도,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활기만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가끔 가족들과 이곳을 다시 찾을 때면, 현대적인 건물들 사이로 슬쩍 보이는 오래된 뒷골목의 풍경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끼곤 합니다. 어느덧 부쩍 커버린 아이는 제 추억과는 상관없이 그저 눈앞의 세련된 카페에 관심을 두지만, 그 무심한 뒷모습을 보며 저는 제가 걸어온 시간의 궤적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달라졌고 제가 관심을 두는 분야도 이제는 감성보다는 실리에 가까워졌지만, 가끔은 이렇게 목적지 없이 걷는 시간이 삶의 균형을 잡아주기도 합니다.
도시의 개발과 변화는 멈출 수 없는 흐름이기에 사라진 것들에 대해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종로 피아노거리가 우리에게 주었던 그 따뜻한 정서만큼은 마음 한구석에 잘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그 길 위에서 꿈꿨던 미래가 지금의 모습과 조금 다를지라도, 그 시간들이 밑거름이 되어 지금의 견고한 삶을 만들어냈을 테니까요.
피맛골의 허름한 대포집에서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던 청춘의 한때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고단한 직장 생활도 묵묵히 버텨낼 수 있는 힘이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퇴근길에 다시 그 자리를 지날 때는 아침보다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걸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변해가고 또 새로운 랜드마크가 들어서겠지만, 우리 세대가 공유했던 그 특별한 공간의 기억은 여전히 종로라는 도심의 공기 속에 녹아 흐르고 있습니다.
다시 써 내려가는 서울의 기억과 새로운 시작
우리가 사랑했던 장소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이 헐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간 일부가 세상에서 지워지는 것과 같은 서글픔을 동반하곤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빈자리는 새로운 사람들의 새로운 추억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저의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이 거리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아마 그때의 아이도 저처럼 변해버린 풍경 속에서 자신의 청춘 한 조각을 찾으려 애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소는 유한하지만, 그 안에서 피어난 감정은 기억을 통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믿기에 저는 오늘 사라진 것들에 대한 인사를 건넵니다.
오늘 하루, 우연히 마주친 추억 한 조각 덕분에 매일 반복되던 무채색의 출근길이 한 편의 짧은 여행처럼 화사하게 변했습니다. 경제 지표를 확인하고 오늘의 뉴스를 챙기며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도, 가끔은 이렇게 과거의 나를 만나러 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종로 피아노거리와 피맛골은 지도 위에서 사라졌을지언정, 제 마음속 지도에는 여전히 가장 따뜻한 색깔로 칠해져 있습니다. 다시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사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묘한 활기가 생겼습니다. 변화를 수용하되 소중한 기억은 잃지 않는 것, 그것이 격변하는 서울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제가 터득한 작은 삶의 지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일 아침에도 저는 종각역에서 내려 이 길을 걷겠지만, 이제는 사라진 풍경들이 주는 위로를 느끼며 한층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로 피아노거리

